老老扶養, 그 서글픈 축복에 대하여

97세 노모와 68세 아들의 불협화음 교향곡

멈춰버린 시간과 흘러가는 시간의 충돌

새벽 공기가 차갑다. 환갑을 지나 고희를 바라보는 68세 아들은 욱신거리는 무릎을 비비며 주방으로 향한다. 스마트폰 앱을 켜고 요리 레시피를 검색한다. 유튜브속 요리사는 손쉽게 뚝딱 요리를 만들어 내지만 노안이 온 아들의 눈에는 고춧가루 한 큰 술과 간장 한 작은 술의 구분조차 헤맨다.

정성을 다해 차려낸 밥상 앞에 97세 노모가 앉는다. 힘들어 깊은 한숨을 내쉬고 한 수저를 뜨기도 전에 타박이 날아온다. “ 짜다, 너는 나이를 먹어도 이 모양이냐, 아니면 싱거워서 맹탕이다. 먹을 게 없다” 아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요리 레시피 보고 따라 하느라 진땀을 흘린 노력은 노모의 망각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결국 식탁 한편에는 배달음식이 올라오고 아들은 허탈한 마음을 식은 국물과 함께 삼킨다.

이것은 어느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초고령사회의 한복판, 안양시 평촌동 어느 골목에서 혹은 우리가 사는 이웃집에서 매일같이 연주되는 노노부양의 거친 불협화음이다.

라는 이름의 무거운 멍에, 노노부양의 현실

우리는 오랫동안 살아실제 집안의 보배는 부모님이라 배웠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고자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은 스트레스 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97세 어머니는 치매는 아니지만 체력은 고갈되고 기억의 실타래는 수시로 엉키고 있다.

하루는 경로당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대뜸 아들을 야단친다. 거기서 준 선물을 네가 받아놓고 왜 딴소리냐! 아들은 받은적이 없다고 항변하지만 어머니의 호통 앞에 68세 아들은 다시 철부지 어린시절로 되돌아간다. 화장실 물을 내리지 않아서 냄세가 난다고 조심스레 한마디 건네면 “너도 내 나이 돼봐라 에미를 왜 구박하느냐”며 짐짓 서운함에 삐치신다.

방금 식사를 마치고도 “배가 고프다. 군것질 거리 사오라” 떼를 쓰는 어머니를 보며 자문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 왔는가? 내 남은 삶은 또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신체 기능은 감퇴하고 사회적 역할은 퇴직과 함께 멈춰버린 중년의 끝자락, 아들은 돌봄의 주체이기 이전에 자신 또한 돌봄이 필요한 대상임을 문득 깨닫는다.

3시간의 위로와 21시간의 고독

정부 복지시스템상 요양보호사가 하루 3시간만 머무르다 간다. 그 시간은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은 짧은 휴식 시간이다 나머지 21시간은 오롯이 고령의 아들과 노모의 몫이다. 좌충우돌하고 부대끼며 서로의 살을 맞대고 살야야 하는 이 절대적인 시간동안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는 때론 감옥이 되기도 한다.

주변 지인들은 이제 그만 요양원에 모셔라 너도 살아야지 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하다 ‘죽어도 내 집에서 죽으련다, 나랑 살기 싫으면 네가 나가라’ 그 호통 속에는 버려짐에 대한 공포와 자식에 대한 마지막 집착이 서려 있다. 효를 다하고 싶어 집을 지키지만 마음속에서는 수시로 불효의 악마가 고개를 쳐든다. 소리를 지르고 싶다가도 굽어버린 어머니의 등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 노노부양이 겪는 효와 불효의 양가 감정이다.

개인의 고통을 넘어 사회적 고립으로

이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인내나 한 가정의 도덕성 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3세대는 현격한 세대차이로 孝라는 가치에 무관심하다. 자신들의 생존조차 버거운 삶 속에서 할머니와 아버지의 갈등은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핵가족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고 의술의 발달은 고령화의 시계를 더욱 앞당기고 있다

노노부양은 단순한 스트레스를 넘어 심리적 내적 갈등을 유발하고 나아가 고령의 수발자(아들)를 우울중의 벼랑끝으로 내몬다. 사회적 고립은 필연적이다. 친구를 만나러 마음편히 나갈수도 없는 아들은 어머니의 그림자가 되어 함께 늙어간다. 이것은 가족의 문제를 넘어선 심각한 사회적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주해야 할 교향곡

이제는 효의 개념을 재정의해야 한다. 과거의 효가 자식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했다면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그 짐을 나누어 지는 “사회적 효”가 실현되어야 한다. 21시간의 고백적인 고립을 해결할수 있는 촘촘한 지역사회 돌봄망이 절실하다.

동시에 68세(58년 개띠생) 아들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당신이 겪고 있는 그 짜증과 화 그리고 뒤이은 자책감은 당신이 불효자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며 당신이 여전히 어머니를 사랑하고 책임지려 노력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비록 음식이 짜다 싱겁다 투정을 부리고 있지도 않은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억지를 쓰며 화장실 문을 열어둔채 서운함을 토로하는 97세 노모일지라도 그녀는 당신을 세상에 존재하게 한 유일한 뿌리다. 그리고68세 당신은 그 뿌리를 지탱하는 가장 굵고 단단한 가지다.

거울속 내 미래를 보듬으며

오늘도 어머니의 투정을 뒤로하고 군것질거리를 사러 나선다. 골목 어귀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굽은 등과 느려진 걸음걸이 아들은 그 그림자 위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너도 내 나이가 돼봐라”

어머니의 그 말은 저주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맞이하게 될 필연적인 예언이다. 노노부양의 불협화음은 어쩌면 우리가 미래의 나 자신에게 보내는 예행연습 일지도 모른다. 비록 스트레스로 가득찬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 아주 가끔씩 피어나는 어머니의 미소 한자락을 붙잡고 아들은 다시 주방으로 향한다.

이 땅에 수많은 고령의 자식 여러분! 당신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다. 하지만 부디 스스로를 돌보는일에도 소홀하지 마시라. 당신이 무너지면 어머니의 세상도 무너진다. 우리는 지금 효라는 이름의 가장 길고도 함난한 마라톤을 함께 뛰고 있다. 서로 어깨를 토닥이며 이 길을 끝까지 완주할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글: 이영진(전 한양대 특임교수,보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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